육상의 전성기
전천후 트랙의 등장, TV의 보급, 스타팅 블록의 개량, 맞춤 신발 등 육상의 기자재가 계속 개선되고, 1974년에는 올림픽 현장에서 아마추어라는 용어가 삭제되면서 프로와 아마의 구분까지 없어지자 육상경기를 비롯한 스포츠의 모든 종목에서 눈부신 발전이 거듭되었다.
특히 1981년 IAAF에 이탈리아 출신의 새로운 회장 프리모 네비올로(Primo Nebiolo, 1923~1999)가 취임하면서 육상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젊은 시절 럭비와 멀리뛰기 선수로 활약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나치 지하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건설업으로 크게 성공한 그는 1970년대에 체육계에 투신하여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 회장, 하계올림픽연맹 회장, IOC 위원 등을 역임하며 20여 년 동안 사마란치와 더불어 세계 체육계에 군림하였다. 그리고 프리모 네비올로 전 IAAF 회장는 IAAF 회장 재임 중 국제연맹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1983년 세계 육상선수권대회를 신설하여 올림픽, 축구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의 하나로 대회를 육성한 것은 그의 공적이다.
1999년 그의 급서(急)와 함께 당시 수석부회장이던 라민 디악(Lamine Diack)이 회장직을 승계하였다. 디악 회장은 세네갈의 저명한 정치가 출신으로 체육부 장관, 국회부의장, 수도 다카(Dakar) 시장 등을 역임하였다. IOC 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회장 취임 후 ‘육상발전 10개년 계획’을 추진 중인데, 이는 육상경기가 스포츠의 왕좌를 차지해야 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대구 대회는 역대 13회 대회로서 비인기육상 지역에서 열리는 최초의 대회이다. 대구가 모스크바나 브리즈번 같은 세계적 도시와 겨루어 대회를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획기적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IAAF 집행이사들이 대구에 표를 몰아준 것은 한국 육상의 진흥을 통해 세계 비인기 지역의 육상을 발전시켜 보겠다는 야심찬 구상과 격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 루이스(Carl Lewis)
서울올림픽 100m 우승자인 칼 루이스는 바로 육상의 전성기에 때맞추어 나온 신세대 선수요, 20세기 후반 육상을 화려하게 장식한 영웅이었다.
1961년 7월 1일생인 그는 1979년부터 1996년까지 장장 17년에 걸친 선수생활을 통해 9개 금메달을 포함 총 10개의 올림픽 메달과, 10개의 세계선수권대회 메달(그 중 금메달 8개)을 획득하는 초인적인 활약을 하였다.
그는 100m, 4×100m 릴레이, 멀리뛰기에서 세계기록을 수립하였고, 10년 동안 무려 65회의 멀리뛰기 연속 우승은 전무후무한 기록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84년에 수립한 그의 실내 (Indoor) 멀리뛰기 기록 8.79 미터는 아직까지 아무도 깨지 못하고 있다.
칼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부모가 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었고, 또 양친 모두 육상선수 출신으로 특히 어머니 이블린은 세계적인 80m 허들선수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미국 대표선수로도 출전하였다.
부모는 아들이 음악 공부를 하길 바랐으나, 어릴 적부터 육상경기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여 또래의 아이들이 장차 배우가 되고 소방관이 되겠다는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육상선수가 그의 꿈이었다. 그리고 선수로서의 기량도 뛰어나 그는 이미 고교시절에 정상급(멀리뛰기 8.13m)선수가 되었다. 1978년 많은 대학의 스카우트 제안을 사양하고 유명한 코치 텔레즈(Tom Tellez)가 있던 휴스턴 대학에 육상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육상선수로서 특이했던 점의 하나는 그때만 해도 육상경기는 아마추어 운동으로 간주되어 육상을 해서는 생활이 되지 않던 때인데도, 텔레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는 오로지 육상선수로서만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라고 하면서 육상경기만으로 먹고 살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훗날 그는 육상만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운동의 상업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여 많은 육상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사회적으로도 신분이 상승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아마추어리즘이야 말로 스포츠에서 없어져야 할 최악의 인간차별”이라면서 탈 아마추어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침없는 공공연한 스포츠 상업주의 옹호와 거만한 그의 천성은 때때로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그의 또 다른 면모의 하나가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다. ’87년, 그의 치열한 경쟁자였던 벤 존슨에게 100m를 패한 후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84년 LA 올림픽에서 딴 100m 첫 금메달을 아버지 목에 걸어 장례식을 치렀다. 아까워하는 어머니를 보고 한 그의 말은 “또 따면 되는데 뭘…!” 아버지를 위해서는 아까울 게 없는 그였다.
숨겨진 기록의 진실
칼의 여러가지 걸출했던 일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의 하나가, 칼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10초의 벽을 깬 최초의 선수라는 것이다. 물론 기록상으로는 ’68년 멕시코에서 하인즈(9.95)가 10초의 벽을 처음으로 돌파한 선수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하인즈의 기록은 15년이 지난 1983년 7월 3일 콜로라도 주에 있는 미 공군사관학교에서 미국의 캘빈 스미스(Calvin Smith)가 9.93(뒷바람 1.4m)으로 경신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기록을 엄밀히 따져보면 둘 다 2,000m가 넘는 고지에서 나온 기록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하인즈는 고도 2,240m의 멕시코시티에서 수립한 것이고, 스미스 또한 2,194m의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얻은 기록이다. 결국 하인즈의 기록이 15년이나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록이 고지 기록이었기 때문에, 콜로라도 같은 고지가 아니면 기록경신이 어려웠던 실상을 알 수 있다.
일본육상연맹의 기록담당이었던 노구치(野純正씨의 연구에 의하면 멕시코시티의 기압은 평지의 3/4으로, 100m 10초의 평균속도인 초당 10 미터의 속도로 선수가 달릴 경우 2,200m 고지에서는 100미터에 0.106초가 단축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인즈가 평지(표고 (0)에서 뛰었다고 가정하면 이론상 그의 기록은 10.05가 되는 것이다. 1/100초를 따지는 100미터 경주에서 0.106초의 기록이 미치는 치명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지에서 10초의 벽을 깬 선수는 누구인가?
스미스의 기록보다 두 달 앞선 1983년 5월 14일 캘리포니아 모데스토에서 ‘S&W Classic’ 이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칼 루이스가 9.97의 기록으로 10초를 깬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평지에서 10초의 벽을 돌파한 것이다. 이때 뒷바람은 1.5m/sec 였다.
IAAF의 공식기록에서도 표고 1,000m 이상의 고지 경기에 대해서는 기록 앞에 영문자 A(Altitude)를 표기하여 평지 기록과 구분하고 있다.
참조 : 황홀한 경주 100m: 우사인 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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