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라이벌
1988년 9월 24일 오후 1시 30분,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의 8만 관중은 숨막히는 긴장 속에 100m 육상트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누구인가를 가려내는 100m 남자 결승이 시작되려는 참이다.
8명의 결승주자들은 출발선상에서 심장의 격렬한 박동을 진정시키며 출발신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8만 관중은 물론, 전 세계 수십억 TV 시청자들의 관심은 바로 미국의 칼 루이스(Carl Lewis)와 캐나다의 벤 존슨(Ben Johnson)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이야말로 세계가 주목하는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칼은 84년 LA 올림픽에서 9.92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을 하였다. 벤은 87년 로마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9.83의 세계신기록으로 칼을 눌렀다. 그런데 다음 해 서울올림픽 직전인 88년 8월, 취리히에서는 칼이 다시 벤을 1미터 이상 따돌리고 우승하였다. 큰 대회 때마다 세계 정상을 놓고 엎치락뒤치락해온 이들 중, 서울에서는 과연 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올라설 것인가가 세계의 관심거리였던 것이다.
‘탕’ 하는 출발신호와 함께 여덟 명의 선수들이 총알처럼 튕겨나갔다. 제일 먼저 뛰쳐나간 선수는 역시 벤이었다. 벤의 반사 신경은 정말 발군이었다. 그리고 4초가 지났을 때 벤은 이미 30 미터를 넘어 피라미드의 정점을 이루며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마침내 초당 12 미터의 가속을 내면서, 벤은 칼을 2 미터 가까이 제치고 우승하였다. 이때 전광판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9.79를 표시하고 있었다. 벤은 지금 자신의 종전 세계기록인 9.83을 경신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 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3일 후 벤은 약물 사용이 드러나 자격을 박탈당하고 금메달은 2위를 한 칼(9.92)에게 돌아갔다.
세계신기록, 약물 사건, 자격 박탈, 그리고 금메달의 주인이 바뀌는 희귀한 사건의 연속은 서울올림픽을 세계의 주목거리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약물 검사로 까다로운 금지약물을 검출해 낸 한국의 기술력이 세계적으로 평가 받는 계기가 되었다.
2009년 8월 16일, 불세출의 영웅 우사인 볼트(Usain Bolt, 자메이카)가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00m를 9.58초로 주파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9.58이라면 보통 사람이 숨을 세 번 쉬는 것보다 짧은 시간이다. 따라서 육상의 100m 경주는 모든 운동을 통틀어 가장 짧은 시간에 끝나는 운동이다. 그래서 폭발적인 스피드와 함께 사람들의 호흡조차 멈추게 하는 압축된 긴박감은 어쩌면 관중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유일한 운동일 것이다.
보다 빨리, 보다 높이, 보다 힘차게
라틴어의 ‘보다 빨리(Citius)’, ‘보다 높이(Altius)’, ‘보다 힘차게(Fortius)’라는 명구(名句)는 올림픽의 모토이기도 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지향하는 본질이다.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남보다 빠르고, 힘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그런 점에서 보다 나은 기록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육상경기는 이 세상의 원리에 가장 부합하는 운동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100분의 1초를 두고 겨루는 100m 경주는 도전정신의 압권이다.
IAAF(국제육상경기연맹)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최초의 100m 세계기록은 1912년 미국의 리핀콧(Don Lippincott)이 세운 10.6이다. 현재 세계기록은 우사인 볼트가 2009년 베를린에서 세운 9.58. 결국 100미터 기록 1.02초를 단축하는 데 무려 97년이 걸린 셈이다. 그것도 16명의 천재들이 오랜 세월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고지였다. 지금은 100m 9초대가 보통이지만, 오랜 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인간이 100m를 10초에 달릴 수 있을까?”, “10초의 벽을 깨는 시기는 과연 언제가 될까?”였다. 10초 플랫을 기록한 것이 1960년이고, 10초 벽’ 의 돌파는 8년 후인 1968년에야 가능했다.
100m 세계신기록을 가장 오래 지킨 선수는 미국의 제시 오웬스(Jesse Owens)였다. 1936년 6월 20일, 시카고에서 열린 북미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오하이오 주립대 학생 오웬스는 10.2로써 세계기록을 수립하였다. 오웬스의 기록은 20년이 지난 1956년에야 미국의 윌리엄스(Willie Williams)에 의해 경신됐는데, 겨우 0.1초를 단축한 10.1이었다.
오웬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육상선수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무려 4 종목(100m, 200m, 400릴레이, 멀리뛰기)의 금메달을 땄는데, 그로부터 64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웬스와 같은 기록을 세운 선수는 1984년 LA올림픽의 영웅 미국의 칼 루이스뿐이다.
올림픽에서 돌아온 오웬스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오웬스 같은 영웅도 당시 미국에서는 활동할 무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일이 클리블랜드 유원지에서 130달러짜리 월급쟁이 생활을 하다가, 흥행꾼들의 주선으로 말이나 오토바이 따위와의 경주로 생활을 하였다. 결국 돈벌이를 위해 달리기를 한 그는 아마추어 자격을 잃었고 그 후로는 올림픽에 출전할 수가 없었다. 마땅한 후원자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오웬스 개인의 불행이기도 하지만, 세계육상의 발전을 위해서도 애석한 일이었다. 오웬스야 말로 100m 기록의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참조 : 황홀한 경주 100m: 육상의 전성기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