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같은 사나이
9만 명의 관중이 숨을 죽이고 한 사나이를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2008년 8월 20일, 세계의 명물 베이징의 올림픽 주경기장은 심해와 같은 정적에 쌓여 있었다. 같은 시각, 20억의 세계 TV 시청자들도 과연 누가 올림픽 100m의 패자가 될 것인가를 보기 위해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탕하는 출발 총성과 함께 8명의 결승주자들이 일제히 튕겨나갔다.
사람들의 관심은 유별나게 키가 큰 한 사나이에 집중되고 있었다. 누구는 그를 ‘괴물(Freak)’이라고 불렀다. ‘화성에서 온 사나이’ 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과연 ‘괴물’은 로켓과 같이 뛰쳐나가 흐르는 별처럼 달려 그대로 골인하였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의 생각이 잠시 멈추었다. 우주의 운행까지도 멈춘 듯하였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멈추었던 숨을 휴… 하고 내쉬었다.
9초 69! 전광판에선 ‘세계신’과 함께 9.69 라는 숫자가 껌벅이고 있었다.
우사인 볼트(Usain Bolt)
우사인 볼트, 23세, 국적 자메이카, 신장 196cm, 체중 76kg, 반응시간 0.185, 바람 0m/sec. 이 사나이가 정말 세계가 깜짝 놀랄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9.69(실 수치는 9.683) 라는 기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것이지만,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볼트가 그보다 더 좋은 기록을 내고도 남을 선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골인 직전 자기 가슴을 두드리는 세레머니를 한다고 속도를 뚝 떨어뜨렸다. 그냥 내달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러고도 세계신기록을 냈다면 정말 소문대로 그는 괴물인가?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뛸 수 있을까?
한 연구자는 볼트의 위치, 2등을 한 톰슨과 비교한 볼트의 속도, 가속력을 고려할 때, 그리고 마지막 세레머니를 하지 않았다면 9.55로 골인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마지막 20m에서 0.14초나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한편 볼트의 코치 밀스(Glen Mills)는 60m 지점의 속도를 기준으로 계산할 때 볼트는 9.52의 기록을 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제 혜성처럼 나타난 이 사나이는 육상 100m를 세계적인 얘깃거리로 만들었고, 놀라움과 두려운 마음으로 인간의 한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있다.
우사인 볼트는 1986년 8월 21일 자메이카의 작은 마을 트레라우니(Trelawny)에서 식품가게를 하는 부모의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난꾸러기인 이 소년은 낙천적이고 또 운동을 너무도 좋아하였다.
12살 때 학교에선 이미 제일 잘 달리는 선수가 되었으나 육상보다는 크리켓이나 축구를 더 좋아하였다. 육상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간 그는, 맥닐(Pablo McNeil) 코치 지도로 전국 고교육상대회에서 200m를 22.04로 준우승하였다.
15세가 되는 2001년 IAAF 세계청소년육상대회에서는 결승을 앞두고 장난기가 발동, 근처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 바람에 낭패를 보았고, 2002년의 IAAF 주니어 챔피언십에서는 200m를 20.61로 우승을 하였다. 2003년에 다시 청소년대회에 참가 20.40으로 200m 대회기록을 수립하였다. 볼트의 장래성이 보이자, 자메이카 육상연맹은 때맞추어 유텍(University of Technology)에서 훈련을 받게 한다.
17세에 주니어 세계의 200m를 제패한 그는 어른의 세계까지 석권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그렇게 만만치 않은 것, 2003년 파리 세계육상선수권 대회 때는 결막염으로, 2005년 헬싱키 대회 때는 다리 부상과 자동차 사고로 출전조차 해보지 못한다.
2004년, 육상선수라면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미국 대학으로부터 장학생 제안을 받는다. 그런데 이 시골 청년은 어인 일인지 그 좋은 조건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미국보다는 열악한 훈련 환경을 선택, 킹스턴의 유텍에 남아 훈련을 계속하였다.
2005년 유명한 글렌 밀스 코치를 만나 2006년 로잔 그랑프리에서 개인최고기록(19.88)으로 동, 슈투트가르트 세계 육상파이널에서도 동(20.10), 아테네 올림픽에서 은(19.96) 등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 나갔다. 2007년에 들어서자 볼트는 코치에게 100m 훈련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밀스는 단연코 거절한다. 그 대신 조건을 걸었다. 즉 자메이카 200m 국내 기록을 세우면 100m를 뛰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2007년 6월 24일, 마침내 19.75로 국내 최고기록을 수립하자, 밀스는 약속대로 새로운 종목 100m 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0여 일 후인 7월 18일 크레테 섬의 바르디노이아니아(Vardinoyiannia) 대회 100m에 첫 참가, 놀랍게도 10.03으로 우승하였다.
2007년, 대망의 오사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기대와는 달리 200m를 19.91로 2위에 그치고 만다. 여기에서 라이벌인 타이슨 게이(Tyson Gay)는 19.76으로 대회 최고기록을 수립하였다. 역시 세상은 넓고 인물은 도처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불세출의 영웅도 2007년에는 금메달을 단 한 개도 따질 못했다. 아무리 천재라도 경륜과 훈련이 모자라면 큰 물건이 될 수 없다는 교훈이다.
오사카 대회 이후, 이 천재는 비로소 육상경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누구보다 볼트의 장점을 아는 밀스는 묵묵히 그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며 세기의 거물이 되도록 담금질을 계속하였다. 196cm의 별난 그의 신장은 사실 약점인 동시 강점이기도 하였는데, 커브에서 균형과 안정을 어떻게 잡는가, 어떻게 하면 스트라이드 속도(Stride Frequency)를 높이느냐가 관건이었다.
2008년 5월 3일. 자메이카 초청대회(Jamaica Invitational)에서 드디어 뒷바람 1.8의 유리한 조건하에 100m를 9.76으로 끊었다. 본인 자신도 놀랐다. 100m를 시작한 지 불과 5번의 대회 참가다. 백전노장 아사파 파월(Asafa Powell)의 세계기록 9.74와 비교할 때도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밀스는 오래 전부터 이 천재가 머지않아 더 큰 일을 저지를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밀스의 예측이 적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8년 5월 31일. 뉴욕 아이칸(Icahn) 스타디움에서 드디어 큰일을 냈다. 9.72. 세계신기록! 뒷바람 1.7. 이 날 숙명의 라이벌 타이슨 게이는 2위로 밀려 기록은 9.85에 그쳤다. 오랜만에 볼트와 겨루어 본 게이는 “옆에서 뛰는 그 친구 무릎이 내 얼굴 높이까지 올라가는 데는 기가 질렸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타이슨 같은 세계 최고의 스프린터까지도 감탄하고 있다면 도대체 볼트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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