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경주 100m: 격동의 시대

황홀한 경주 100m 단거리 질주 모습

 

격동의 시대

 

6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60년대 후반으로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이 폭풍의 20여 년 동안 프라하의 봄은 소비에트 전차에 무참히 짓밟히고(’68),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 착륙에 성공하고(69),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고(78), 80년 모스크바와 84 LA올림픽이 공산권과 민주진영이 번갈아 참가를 포기하는 바람에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고, 홍콩이 중국에 반환 되고(’84),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89), 독일이 통일되고(’90),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해체되는(92) 등, 일련의 대 사건들이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났던 것이다.

육상경기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여러 면에서 개량과 발전이 거듭되었다.

트랙의 발전

우선 우레탄 등 인공소재로 만들어진 전천후 육상 트랙의 출현은 기록 향상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때 미국의 3M사가 만든 우레탄 트랙이 사용되었는데, 육상 개인 종목에서 무려 9개의 신기록이 나온 것도 이의 영향이 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멕시코시티는 해발 2,240m의 고지라서 기압 차이에서 오는 이점이 더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레탄 제품의 전천후성과 이 트랙이 주는 적당한 탄력이 순발력과 스트라이드(Stride)에 좋은 영향을 준 것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역대 100m 결승 결과가 가장 좋았던 대회가 처음으로 전천후 우레탄 고속 트랙이 깔린 1991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였는데, 이때 무려 6명의 주자가 9초대를 마크하였다.

1960년대까지의 육상트랙은 소위 앙투카(en-tout-cas) 포장이었다. 앙투카란 ‘모든 경우에’라는 프랑스어인데, 앙투카 포장은 점토를 고온으로 구운 다음 분말로 만들어 포장하기 때문에 적당한 강도와 배수성이 좋다. 따라서 테니스 코트로 많이 쓰이던 것을 육상경기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앙투카의 배수성이 아무리 좋다고는 하지만 많은 비가 왔을 때는 전천후 트랙인 우레탄 제품에는 미칠 수가 없었다.

대구도 2011년 8월에 열리는 세계육상대회를 앞두고 트랙의 재질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즉 폴리우레탄 트랙이냐, 아니면 복합탄성고무 트랙이냐를 놓고 시공업체 사이에서도 치열한 경합이 있었다. 폴리우레탄은 충격을 잘 흡수하기 때문에 중·장거리에 유리하고 선수 보호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복합탄성고무 트랙은 스파이크의 밀림 현상이 적어 폭발적인 스퍼트가 필요한 단거리에 유리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대구 조직위원회는 복합탄성 고무 트랙으로 결정하였다. 세계인의 관심이 쏠리게 될 100m에서 더 좋은 기록이 나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스타트(Start) 자세

100m 경기에서 익혀야 할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가 출발이다. 따라서 출발할 때의 자세와 방법, 그리고 힘찬 첫발을 내딛기 위한 킥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은 표준화된 소위 크라우칭(Crouching) 자세는 일찍이 1887년 미국 예일대학의 유명한 육상코치 마이클 머피(Michael Murphy)가 창안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장점을 미처 몰라 널리 보급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1896년 제1회 올림픽 때만 해도 100m 출발자세는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커티스(Thomas Curtis) 선수가 12초 1/5로 예선에서 1위를 하고, 또 결승에서도 미국의 버크(Thomas Burke)가 같은 크라우칭 자세로 12.0의 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자 그 장점을 모두 인정하여,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부터는 모두 이 자세를 쓰기 시작했다.

스타팅블록(Starting Block)

지금은 100m부터 800m(장애물경기 포함) 경기에서 쓰고 있는 스타팅 블록은 일찍이 1927년 미국의 한 대학생이 발명한 것이다. 처음에는 몇 선수만이 쓰기 시작하였는데, 블록을 사용한 선수가 유리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즉 100 야드 경기에서 블록을 사용한 선수는 사용치 않은 선수보다 약 0.03초나 기록이 단축된다는 사실이었다. 11)따라서 전미 대학 체육협회(NCAA)와 IAAF가 한동안 사용을 금지하였다.

IAAF가 공식적으로 스타팅 블록의 사용을 인정한 것은 베를린 올림픽 후 3년이 지난 1939년이었다. 스타팅 블록은 그간 개량을 거듭하여 부정출발을 자동 체크할 정도로 정교해졌다. 출발신호가 난 후라도 0.1초 안에 스타팅블록에서 발을 떼면 부정출발이 된다. 사람의 신경은 0.1초 내에 반응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2010년부터는 단 한 번의 부정출발도 인정하지 않게 되었는데,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많은 논의와 여러 차례의 규정 변경이 있었다.

과거에는 한 선수가 부정출발을 두 번 범해야 실격처리되었는데, 2003년부터 규정을 강화하여 한 경기에 한 번만 부정출발을 허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즉, 누군가 첫 부정출발을 했을 때 한 번은 불문에 부쳐지지만, 누구든 두 번째 부정출발을 하면 한 경기에 부정출발은 한 번만 허용되므로 그 선수는 단 한 번의 실수를 한 것이지만 실격처분되었다. 그러나 이 규정도 2010년부터 더욱 강화되어 부정출발은 아예 인정되지 않게 된 것이다. 즉, 누구든 출발신호 후 0.1초 이내에 출발하게 되면 실격 당하게 되는 것이다.

스파이크의 발달

신발의 개량도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였다. 실제 육상 단거리에서 스파이크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래서 스파이크 개량에는 인체공학과 첨단과학이 최대로 응용되었다.

칼 루이스는 1984년 LA올림픽에서 기존의 스파이크화와는 다른 런닝화를 신었다. 즉 기존 스파이크는 플레이트(앞 창) 길이가 발 전체의 3분의 2정도였는데 칼은 발 길이와 같은 것을 사용하였다. 이 신발은 코너링할 때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게도 120g 밖에 안 나가는 경량이었다. 칼은 이것으로 200m에서 금메달을 땄다.

명품 신발로 유명한 선수로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200m, 400m 2관왕인 마이클 존슨을 뺄 수 없다. 그는 소위 ‘황금 신발’로 알려진 황금색 신발로 ‘미스터 골드’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나이키는 존슨이 달리는 모습을 고속 카메라로 촬영했다. 그런데 존슨이 발을 끄는 습관이 있었고, 코너에서는 양 발의 움직임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양쪽 발의 밑창 플레이트를 비대칭 형태로 설계해 무게를 112g으로 줄였다.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황금색 신발이 아니라 24K 순금을 사용한 진짜 황금 신발을 신었다. 24K 순금을 사용해 만든 특수 섬유의 신발은 공기저항을 최대한 줄인다고 하였다. 신발 메이커는 200m에서 11cm, 즉 100분의 1초를 단축하는 효과를 얻었다고 하였다.

저스틴 게이틀린(Justin Gaitlin)이 신었던 몬스터 플라이 (Monsterfly)는 파워 스프린터를 위해 개발된 100m 경기용 신발이다. 지면과 발, 발목의 각도를 적절하게 유지하여 몸 전체의 탄력을 살릴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다. 이 스파이크는 스타팅 라인에서 반발력을 크게 하여 단거리 스프린터들에게 유리하였다. 게이틀린은 이 신발을 신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100m를 9.85의 기록으로 우승을 한다.

 

참조 : 황홀한 경주 100m: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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